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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의 연구사 오경신학

출애굽기의 연구사


한 동 구 (평택대)


§1. 문제의 제기
세계 학계의 학문적 경향은 유수와 같아, 얼핏 보면 변화지 않고 정체되어있는 것 같으나, 좀 긴 시간대를 바라보면 새로운 경향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음을 볼 수 있다. 필자는 1995년에 신명기 역사서의 연구사를, 1997년에는 오경의 연구사를 소개하였다.1) 지금 10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출애굽기의 연구사를 작성하게 되어, 새로운 자료를 살펴보니 엄청나게 많은 연구자료들이 출판되었다.
지금의 오경 연구는 쿠에넨(A. Kuenen)-벨하우젠(J. Wellhausen)의 후기 원본설 (J-E-D-P)을 수정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군네벡은 1983년 오경연구사 논문2)에서 “(건너편의) 강둑을 향해 출발했으나, (굳건한) 땅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227)고 하였다. 그 이후 오경형성사에 대한 논의는 점차 진전하여 “(건너편의) 강둑 넘어, (굳건한) 땅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고 해야할 것 같다.
여기에서 필자의 논의는 위 두 논문에서 재기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제기만 집중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참조 §4-§5). 그럼에도 새로운 논의를 위해 필요한 선행연구들은 요약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참조 §2-§3).

§2. 자료설
쿠에넨 (A. Kuenen3))은 사제문서(P)의 법조문은 신명기 보다 후대에 법제화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1865년 그라프 (K. H. Graf4))는 네 가지 자료의 연대 순서를 뒤집었다. P자료는 네 자료 가운데 마지막에 성립되었으며, 포로기 혹은 포로기 이후에 집대성되었다고 보았다. 이 같은 체계를 벨하우젠 (J. Wellhausen5))은 보다 명백하게 논증하였다 : 네 자료의 순서를 J - E - D - P로 배열하였다.
J문서와 E문서의 구별이 극히 어렵다는 것이 오래 전부터 인식되어 왔으며, 이러한 상황을 설명해주는 두 가지 노력이 있다. 첫째, 볼츠 (P. Volz)와 루돌프(W. Rudolph)는 E문서를 인정하지 않았다.6) E문서는 독립된 문서가 아니라, 단순히 J문서를 후대에 편집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신명기 학파의 소산일지 모른다고 하였다.
둘째, 아이스펠트 (O. Eißfeldt7))는 J1을 L자료 (Lainenquelle 평신도 자료), 포러 (G. Fohrer8))는 N자료 (Nomadenquelle 유목민 자료)라 불렀다.
이런 시도들은 학계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노트는 여전히 고전적인 구분을 고수했다. 그는 「오경 전승사 연구」9)와「출애굽기」주석 (ATD주석 시리즈)10)에서 출애굽기의 형성에 대하여 밝히고 있다. 현재의 출애굽기는 수 많은 문서의 실줄기들이 오묘하게 짜여진, 즉 매우 복잡한 전승사적 및 문학적 과정의 결과로 이루어 진 것이다.
출애굽기도 다른 오경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야훼문서 (J), 엘로힘 문서 (E)와 사제문서 (P)로 이루어져 있다. J와 E는 비교적 민담적 성격의 고대 자료이며, P는 독특한 신학 사상을 지닌 후대 자료이다. 시내 산 전승에 담겨진 율법들은 각 개체들로 독립되어 있다가 문서화 과정의 어떤 단계에 현재의 위치로 정착되었다.
출애굽기의 형성의 가장 초기 단계는 이스라엘의 太古史 및 초기역사에서 형성된 하나님의 근복적인 행위에 대한 신앙고백문이 있었다. 다음 단계에 이 신앙 고백문에 구전으로 전수된 많은 민담 자료들이 첨가되었다.
문서화 단계는 야훼문서에서부터 이다. J문서는 다윗 - 솔로몬 시대에 형성되었으며, 창조에서 가나안 정착까지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J문서의 두 가지 특징을 노트는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첫째, J문서가 현재의 구조 속에 삽입되었으나, 원래의 형태, 생동감 있는 분위기와 소박한 기질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둘째, J문서는 개개의 전승 자료들을 구속사 신학의 관점에서 바라보아 제의적 성격을 다분히 약화시켰다. 중요한 대목에서는 고대의 전승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했다.
노트는 E문서의 존재를 분명히 인증했다. E문서는 J문서보다 이전에 형성된 것으로 보나, 오경의 문서화 이전 단계에 더 가까우며, P문서 이전에 J문서에 삽입되었다고 보았다. 이 때 E문서는 원형을 완전히 보존하지 못하였고, 다만 중요하게 보이는 요소들만 보존하였다.
P문서는 J-E문서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P문서는 역사과정 자체보다는 사건을 요약적으로 진술하는데 만족한다. P문서는 영원한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는 하나님의 규정과 지시에 관심을 집중한다. 역사 부분에서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본문들 (노아 계약, 아브라함 계약, ...)을 다소 확대시키는 데 만족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루어진 열두 지파의 제의 공동체의 형성과 세부적인 제의 규정의 수립 및 제의 기구들의 제작을 보도하는 시내 산 전승에서 이르러 그의 서술의 목표에 도달한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P문서는 많은 이차적 첨가부분을 얻게되었다.
출애굽기 (=오경)의 최종 형성은 J를 토대로 E가 삽입되어 JE가 형성되었으며, 다음에 P를 토대로 JE가 삽입되어 PJE가 형성되었다.11)

§3. 양식비평과 전승비평
지난 30년 동안 구약성서학의 연구는 출애굽기에 나타난 구두전승 연구에 집중하였다. 궁켈 (H. Gunkel)은 시편형성에 있어서 제의의 역할을 강조하였고, 모빙켈은 1927년 십계명 연구에서 제의의 역할을 출애굽기의 이야기 부분에까지 확장시켰다. 그리고 1934년 유월절 연구에서 제의적 가설을 철저히 적용하였다. 제의 기능에 대한 집중적 논의는 폰 라드 (G. von Rad)12)와 노트의 논문에서 비롯된다.
폰 라드는 육경을 이루고 있는 문장들은 신앙 고백적 문장들이며, 중심적 내용이 (소) 역사 신조 (Credo) 속에 압축되었다고 보았다.13) 또 그는 육경 자체를 하나의 유형 (Gattung)으로 보았다. 역사신조 속에 시내 산 전승이 빠져있으므로, 출애굽 전승과 시내 산 전승을 구분했다. 이 두 전승은 각기 다른 삶의 자리 - 출애굽 전승은 길갈, 시내 산 전승은 세겜 - 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았다.14)
폰 라드의 육경을 하나의 유형으로 이해한 입장은 후에 렌토르프 (R. Rendtorff)와 그의 제자 불룸 (E. Blum)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야뷔스트를 편집적-구성적 신학자로 이해한 것은 후에 레빈 (Ch. Levin)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노트는 「오경의 전승사적 연구」에서 논의의 범위를 크게 확장 시켰다. 그는 다섯 개의 큰 주제를 설정하여 오경을 분석하였다 : 출애굽, 땅 획득, 족장에게 내려준 약속, 광야에서의 인도, 시내 산 계시. 이 다섯 개의 주제는 오경의 기틀을 이루며, 이 주제들과 함께 다양한 전승들15)이 삽입되었다. 이 주제들과 삽입전승들은 다시금 (영웅적) 인물들16)과 결부되어, 보다 큰 이야기의 흐름 속으로 합류되었다. 이 때 편집적 묶음표들 (Verklammerungen), 요셉 이야기 (Die Josephgeschichte), 계보론 (Genealogi- en), 이동 거점표 (Iterare), 등의 편집적 방법이 사용되었다.
노트 연구의 한계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출애굽기 (=오경)의 형성과정에 있어서 편집자의 몫을 극단적으로 제안하여 그에게 주어진 자료를 빠짐없이 열거하는 것만으로 이해하였다.
둘째, 무수한 단락들, 특히 율법적 단락들이 이야기체의 사제문서 (PG)이나 비사제문서(JE)를 전제하는 것으로 보았다.

§4. 새로운 편집사적 연구들
노트 이후의 오경(혹은 사경)의 편집사적 발전은 세 측면으로 전개되었다. 야뷔스트의 연대를 점진적으로 신명기나 신명기 사가의 형성 시기와 유사한 것으로 보았으며, 마침내 야뷔스트의 형성 연대를 포로기로 내려 잡았다. J문서의 특성도 새롭게 이해하였다.
사경과 신명기 역사서와의 관계에 대하여 노트는 상호 연관성 (연속성)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사경 내의 신명기 사가의 편집을 부인하였다. 그는 다만 사경 내의 신명기적-신명기 사가적 삽입구 (=Zusätze)만을 인정하였다.17) 그 후 오경 연구는 신명기의 언어와 정신세계에 속하는 본문들을 증거하는 방향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오경형성의 최종편집에 대하여 두 가지 다른 입장이 전개되었다. 렌토르프와 블룸 등은 편집사적 보충가설 (eine redaktionsgeschichtliche Ergänzungshypothese)과 최근 게르츠는 자료설에 근거한 편집가설 (eine Redaktionshypothese aufgrund der Urkundenhypothese)을 주장하였다.

1) 야뷔스트의 형성연대와 특성
1-1) J문서의 특징
최초의 정경적 편집 혹은 구성은 전통적으로 여호뷔스트(Jehovist - J본문을 토대로 E본문을 결합한 편집자)에게 돌렸다. 최근 스멘트와 렌토르프-불룸은 이를 신명기 사가로 이해하였다. 렌토르프와 불룸은 신명기사가의 편집 (deuteronomistische Kompotion = KD)의 편집상의 특징을 약속주제라 하였다. 그러나 베스트만의 연구18)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약속들의 주제는 매우 다양하며, 신명기사가 뿐만이 아니라, 포로기와 포로 후기에 활동한 다양한 저자들에 의해 사용된 주제다.
폰 라드와 레빈 (Ch. Levin)은 야뷔스트(Jawist)를 편집자로 이해하였다. 레빈은 오경 전체는 편집사적 보충 가설의 틀 속 (im Rahmen einer redaktionsgeschichtlichen Ergänzungshypothese)에서 형성되어졌으며, 편집에 사용된 자료들 (die vorredaktionellen Quellen)에는 단편 가설 (eine Fragmentenhypothese)이 적용된다고 하였다. 그는 종례의 J1과 J2 혹은 Ja와 Jb의 구분을 J문서의 자료들 (vorjahwistische Quellen = JQ)와 J문서의 편집 (die jahwistische Redaktion = JR)으로 구분하였다. 자료들은 어떤 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수의 상호 연계성이 없는 전승 단락이나 단편들 (Überlieferungsblöcken / Fragmenten)로 이루어져 있다. J문서 자료의 일부는 이미 문서화된 것도 있다.19)
야뷔스트는 이러한 자료들을 선별하고, 원래있던 문맥에서 떼어내어, 새로운 이야기의 문맥에 집어 넣었다. 이 때 자료들은 편집되면서 포괄적으로 해석되었다. 야뷔스트는 이야기꾼 (Erzähler)이라기 보다는 편집자 (Redaktor)였다.

1-2) J문서의 형성연대
J문서는 전통적으로는 다윗과 솔로몬의 궁중에서 형성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J문서의 형성 연대를 포로기까지 다양하게 피력하였다. 슈미트 (H. H. Schmid)는 1976년에 출간한 「소위 야뷔스트」라는 저서에서 J문서의 형성연대를 신명기-신명기 사가의 전승에 가까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20) 레빈은 J문서의 편집 시기를 포로기 초기로 보았다. 레빈의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a) 포로기, 즉 국가의 멸망과 함께 많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땅 밖 흩어져 살았고,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야훼 하나님을 섬기고자 했다. 따라서 그들은 예루살렘에서만 예배를 드려야하는 신명기적 요구를 수정하였다. 창 12장 7-8절; 13장 18절에서는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야훼를 섬겼음을 보여주고 있다; 세겜, 벧엘과 아이 사이의 산지 및 마므레 상수리에서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야훼 이름을 불렀다. 또 야곱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과연 야훼께서 여기에 계시는데 내가 그것을 몰랐구나” (창 28, 16), 모세는 광야의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거룩한 땅”을 발견한다 (출 3, 1-5).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시내광야의 하나님의 산이다 (출 34, 5, 9a, 28a).
야뷔스트는 신명기적 요구를 알고 현재 불가능한 상황에 놓인 자들에게 야훼 예배를 가능하게 하도록 수정 (혹은 거절)하였다.
b) J문서의 언어와 사상이 신명기 역사서의 자료에서 이미 발견된다. 레빈은 사사기의 두 본문을 예로 들었다 : 삿 6장 11-24절; 삿 13장 2-24절.
그는 삿 6장 11-24절에서 다음과 같은 자료층을 분리했다 : “(기드온)은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주의 은혜를 얻어사오면,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 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가로되 내가 너 돌아오기를 기다리리라... ” 이 자료층은 언어와 사상에 있어서 J문서와 거의 동일하다. 이 자료층은 신명기 사가의 사사기 도식 이전의 것으로, 신명기 사가의 최초의 편집이 기원전 560-539년으로 볼 때, J문서의 편집은 기원전 587-(아마도) 550년 사이로 보아야 한다.
c) J문서는 역시 제 2 이사야 이전으로 연대를 잡아야 한다. 제 2 이사야의 신학적 특징으로 그는 이전에 왕을 하나님의 종으로 이해한 포로기 이전의 구원 신탁을 받아들여 전이시켰다 :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전체를 창조주 하나님 야훼의 왕적 종으로 이해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하로써의 역할을 이스라엘 민족 전체로 전이시킨 것은 이스라엘 개별적 주인공으로 이해함으로 가능하였다.21) 이와 같은 신학적 전이는 야곱과 이스라엘의 동일시를 전제한다. 즉 창 32장 31절은 J문서의 편집층에 속한다. 제 2 이사야는 J문서의 편집을 전제한다. 제 2 이사야의 형성은 기원전 6 세기 하반부이다.

2) 오경 (사경)에서의 신명기사가의 편집 연구
노트는 신명기에서 열왕기에 이르는 5권의 책이 신명기 사가에 의한 편집서, 즉 “신명기 역사서”라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서, 오경(혹은 사경)에는 신명기 사가의 편집층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오경설을 부인하고 사경설을 주장한다. 그럼에도 그는 사경 내에 무수히 많이 존재하는 신명기적-신명기 사가적 삽입구 (=Zusätze)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최근 오경 연구는 오경 내에 신명기-신명기사가의 언어와 정신세계를 증거하는 본문들의 입증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연구의 경향은 마침내 P문서 이전의 편집을 신명기사가의 편집이라 불렀다.
페어리트는 1969년에 출간한 그의 교수자격논문인 「계약신학」에서 구약성서의 계약사상을 연구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구약성서의 계약사상은 신명기 저자들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히브리어 תיꙞꔶ 및 계약사상이 언급되는 전승은 신명기 및 신명가사가의 전승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그는 출 19 - 24장의 고대전승 (=기본층 출 19*; 24, 1a. 9-11; 24, 4aß.5.6)에는 시내 산 계약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고 있지 않으며, 다만 시내 산 신현현만이 전하고 있음을 밝혔다. 시내 산 전승을 계약신학적 해석은 신명기(출 32 - 34장의 신학적 구조) 혹은 신명기사가(출 19, 3b-8; 20, 1-17; 24, 3. 4aα. 7f.)의 시대에 비로소 일어났다고 주장한다.22)
이와 유사하게 젱어는 1971년에 출간한 「시내 산 현현」이라는 저서에서 시내 산 전승 (출 19 - 24장과 출 32 - 34장)을 분석하여 두 차례의 신명기 사가의 개정층을 주장하였다. 전자는 포로기에 시내 산 전승을 계약신학적으로 해석한 개정층으로 (참조 페어리트), 그는 출애굽기의 십계명을 계약의 근거로 현위치에 오게했으며, 출 24장의 제의 장면을 계약신학적으로 해석했으며, 또한 출 32 - 34장을 화해를 위한 신현현으로 확대했다. 여기에서 돌판은 야훼께서 십계명을 기록한 율법의 돌판이 되었다. 두 번째 신명기 사가의 개정층은 포로후기 초기의 계약법전의 문헌층으로 이스라엘 역사 초기의 이상 시대로의 회귀를 선언한다. 여기에 속한 문헌층은 출 19장 3bβ-9b절; 20장 18. 19절 (사제신학의 삽입과의 비교하라)과 계약법전의 틀에 해당되는 문헌층 (예 출 23, 20-33; 24, 3. 4aαβ. 7; 34, 27)이다.23)
이러한 주장은 계속 발전하여, 오경 내의 신명기-신명기사가의 개정층을 넘어 편집층을 주장하게 되었다. 푸스는 1972년에 출간한 「출 3 - 17장의 신명기사가의 오경편집」에서 신명기사가의 편집층을 주장한다. 그는 출애굽기 3 - 17장의 분석에서 전통적인 J문서와 E문서는 물론 신명기사가(dtr)의 편집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는 신명기 사가의 언어와 표현양식, 문체적 특성, 편집(구성)기법 및 신학적 특성을 설명하였다.24)
신명기사가의 편집에 관한 연구는 아휘스의 논문에서 잘 볼 수 있다. 그는 루프레히트 (E. Ruprecht)의 사경의 신명기사가 편집-이론25)을 받아들여 먼저 민수기의 연구26)에서 보여 주었으며, 출애굽기와 관련하여 유월절-무교절 전승연구에서 신명기사가 편집을 주장한다.27)
아휘스는 이스라엘이 국가가 멸망한 직후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던 레위인들이 솔로몬 시대에 유대 지방 장로들에 의해 형성된 J문서(역사서)와 바벨론 포로기 말기에 형성된 P문서에 특수자료를 받아들여 사경의 신명기사가 편집(eine deuteronomistische Redaktion des Tetrateuch DtrT)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오경 (혹은 사경)의 최종 편집자를 DtrT로 보았다.28) 이러한 견해는 종래의 후기 원본설 (참조 벨하우젠)과 후기 보충가설 (참조 블룸)을 수정한 것으로 출 11장 1절 - 13장 16절의 유월절 전승의 특수성을 설명할 수 있게 했다.
야뷔스트는 유월절 식사의 보도에서 가족전승을 씨족의 차원 (민족의 前단계)으로 전이시켰으며, 사제문서는 유월절 양의 도살에 관한 보도에서 제사장과 가장의 역할의 규정한다 한편 사경의 신명기사가의 편집은 순수 가족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공동체를 전승의 보존자로 강조하고 있다. 야뷔스트는 유월절 전승을 이용하여 그의 감추어진 요구인 (솔로몬 시대의) 정치적 출애굽을 주장하였으며, 사제문사는 직전에 놓인 포로기의 종결을 준비하고 있다. 포로기 직후 이 전의 두 전승들을 수정한 사경의 신명기 사가의 편집은 유월절전승을 무교절전승과 결합시켰으며 이방인 왕에게서의 구출을 회고하고 있다.
그의 분석은 문헌 배후에 놓인 전승집단의 분석에 근거한다. J문서 배후에는 유대지방의 장로들이 전승집단으로 있으며, P문서 배후에는 곧 끝나게될 바벨론 포로기의 제사장들이 전승집단으로 있으며 DtrT의 편집은 레위인들에 이해 수행되었다. 그는 야뷔스트의 장로들의 전승과 사제문헌을 받아들여 유월절(출애굽)과 무교절(땅획득)전승을 포로후기의 상황에 맞추어 수정하였다.
아우렐리우스는 1988년에 출간한 「이스라엘의 중보자. 구약성서의 모세상 연구」에서 모세상에 관한 연구 가운데 모세의 중보기도와 중보자로서의 모세상 연구에 집중하였다. 그는 전통사적으로 최초의 중보기도와 중보기도자는 아모스로 보고 있다.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는 모세상을 최초로 언급한 출 32장의 본질적인 특징은 아모스에게서 빌려왔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모세의 중보자 상은 포로기 이후, 국가의 멸망을 전제한다고 보았으며, 신명기-신명기사가 및 사제문서의 산물로 보았다.29)
사트 (A. Schart)는 1990년에 출간한 「모세와 이스라엘의 갈등」이라는 논문에서 광야전승에서도 신명기사가의 편집층을 찾았으며, 이러한 신명기사가의 편집층은 통일적이지 않고, 다층적으로 발전되었음을 주장한다. 그는 여호뷔스트의 편집을 전제하는 신명기사가의 편집층과 사제문헌을 전제하는 신명기사가의 편집층으로 구분하였다.30)
이러한 발전은 마침내 사제문헌 이전의 편집층을 신명기 사가의 편집층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스멘트 (R. Smend)는 벨하우젠이 JE편집층으로 불렀던 것을 신명기사가로 이해하였다. 최근에는 렌토르프와 불룸 (E. Blum)도 이러한 입장을 따르고 있다. P본문 이전의 본문을 신명기사가의 편집 (스멘트)이나 구성 (불룸)으로 불렀다.31)

3) 오경형성의 최종편집
오경 형성과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 입장이 대별된다. 먼저 렌토르프 (R. Rendtorff)32)와 그의 제자 불룸 (E. Blum)33)은 오경이 단선적으로, 그러나 몇 차례의 (보충적) 편집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이해하였다.34) 최초의 정경적 편집과 그 이후 (보충적) 편집이나 개정을 통해 확장되어 현재의 오경에 도달했다는 입장이다. 이 견해는 편집사적 보충가설 (Ergänzungshypothese)로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전통적 견해로 벨하우젠 이후로 줄곧 제기된 바 몇 개의 자료들을 이용하여 최종 편집자에 의해 현재의 오경이 형성되었다는 입장이다. 이 견해는 원본설 (Urkundenhypothese)로 이해될 수 있다.35)
이 문제는 P문서의 이해에 달려있다. P문서를 독립된 자료/문헌 (Quelle/Schrift)으로 이해하는가 아니며 단순한 개정 (Bearbeitung)으로 보는가 이다. P문서를 독자적인 자료/문헌으로 최종 편집을 통해 현재의 오경에 편입되었다는 입장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P문서가 다른 본문들과 중복된다는 점에 근거하며36), P문서의 불연속적인 측면은 최종편집 (Rp)에 의해 압축된 것으로 설명한다.37) 다른 한편, P문서를 P문서 이전 편집에 대한 보충적인 개정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주장은 P문서가 P문서 이전의 본문 (혹은 편집층)을 제외했을 경우 연속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P이전 본문 (혹은 편집층)을 전제한다는 점에 근거한다.

3-1) 편집사적 보충가설에 근거한 최종 편집
블룸의 견해에 따르면 족장사중 야곱 이야기의 일부가 남북조의 분열 이후 북왕국에서 문헌으로 정착되기 시작했으며, 야곱 이야기는 아마도 기원전 8세기 초엽 요셉 이야기를 포함시켜 확대되었다. 그리고 북왕국 멸망 이후 남왕국에서 다시금 확대 개편되었다. 기원전 722년에서 587년 혹은 아마도 요시아 시대에 야곱 이야기는 창 13장과 28장의 약속을 매개로 아브라함 - 롯 이야기와 결합되었다. 이로써 완전한 족장사가 형성되었다. 족장사는 포로기 동안 창 12, 1-9와 22장이 덧붙여지면서 확대 개편되었다. 기원전 5 세기 초엽에 창 1장부터 왕하 25장까지 연속적인 이야기로 개정되었다. P -본문은 기원전 5 세기 말렵에 이루어진 편집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때, 사제 편집자는 자신의 자료를 삽입하였으며, 동시에 구경을 오경으로 개편하였다. 이 작업에서는 페르시아의 종교법 제정에 직면하여 대다수 사람에게 적용되는 제의 규정과 제 이 성전의 제의를 토라의 일부로 통용시키고자 했다.

또한 블룸은 사제편집 (KP)는 자료 (Quelle)나 편집 (Redaktion)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KP에 돌릴 수 있는 본문들이 주변 문맥으로부터 편집적 결합 (redaktionalle Kombination)으로 돌릴 수 없을 만큼 분명하게 구별된다. 블룸의 견해에 따르면 KP와 이에 선행하는 신명기사가의 편집본문사이에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는 의도적 불연속적 구조화의 결과이다. KP는 선행하는 전승을 수정하려는 의도에서 대립적으로 구조화시켰다.
이러한 대립의 동기를 블룸은 페르시아 제국의 정책에서 찾고 있다. 페르시아 제국은 오경, 혹은 사제편집층의 본문을 유대민족에게 통용되는 제국의 법으로 권위를 부여하였다. 이에 대한 전제는 페르시아 당국이 수용 가능한 법이 제시되어져야 하며 이 법은 유대민족 내부에서도 통용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사제계급의 일방적 독주 역시 배제된다. 유대민족의 법이 페르시아의 국법으로 권위를 부여받은 것은 유대민족 사이에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있는 KD과 사제의 이익을 대변하는 전승이 용된 KP사이의 일치를 의미한다. 블룸은 KD와 KP 사이의 불연속적인 구조는 페르시아 제국의 권위를 빌어 조화를 이루려는 시도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KP는 페르시아 제국의 관점 하에서 작업되어진 것으로 보았다.

3-2) 원본설에 근거한 최종 편집
게르츠는 2000년에 출간한 그의 괴팅엔 교수자격취득 논문 「출애굽사의 전승과 편집 오경최종편집 연구」에서 출 1 - 14(15)장을 분석하면서 오경의 최종편집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출애굽기에서 현재형태의 편집은 사제문서이후 (nachpriesterschriftlich)에 비로소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오경의 최종편집은 선행자료들을 정교하게 배열하고 상호조화를 이루도록 조정하여 사제문서와 비사제문서를 상호 결합하여 이루어졌다.
유월절-무교절 규정(출 12, 1 - 13, 16)에서 최종편집(자)은 사제문서(priesterschriftlich)의 유월절 지시부분 (출 12, 1-13. 18-20. 43-51)과 비사제문헌(nictpriesterschriftlich)의 축제지시부분 (출 12, 21<a>. b-23. <27b>)을 결합하여 레 23장의 지평에서 이를 확장하였다 (출 12, 14-17. 24-27a; 13, 1-16). 편집자의 목적은 선행자료의 결합과 재배열을 통하여 신명기(신 16, 1-18) 축제칼렌트를 사제문서와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었다.
재앙설화(출 7, 8 - 11, 10; 12, 29-36)에서 최종편집자는 사제문서의 다섯 개의 기적을 보도 (뱀, 피, 개구리, 모기와 종기)와 비사제문헌의 네 개의 재앙보도(강물의 부패, 개구리, 등에와 장자살해)를 결합하였으며, 우박, 메뚜기와 흑암재앙을 추가하여 확대시켰다.
갈대바다 기적이야기(출 14장)에서 (최종)편집자는 그에게 주어진 두 자료를 결합과 조화시키는 짧은 메모를 통하여 하나의 새로운 사건으로 재구성하였다.
모세의 소명 이야기(출 2, 23 - 7, 7)에서도 최종편집자는 사제문서 (출 2, 23aβ-25; 6, 2 - 7, 7*)와 비사제문서 (출 3, 1*. 2b. 3a<b>. 4a. 5. 6b-8*. 16f.* <9-12aα.> 21f.; 4, 18. <5, 1f.*>)를 결합하여, 모세의 미디안 망명에 관한 사제문헌 이전의 자료(출 2, 11-23aα; 4, 19. <20a. 24-26>)를 삽입하였다.
재앙설화와 갈대바다 기적이야기의 비사제문서의 자료에서는 출 3, 1ff.의 모세의 소명보도의 보충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최종편집자의 손길은 출 3장에서의 간헐적 보충에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출 4, 1-17. 21-23. 27-31과 출 5, 1 - 6, 1도 그의 손길로 돌릴 수 있다.
출애굽기의 서론(출 1, 1 - 2, 22)에서 게르츠는 출 1장 1-6절을 최종편집이후(nacjendredaktion)의 부분으로 돌리고 있다. 최종편집자는 출 1, 7. 13f.; 2, 23aβ-25; 6, 2ff.의 사제문서 부분과 출 1, 11f. 15-20a. 21f.; 2, 1-22의 비사제문서부분을 결합하였다. 비사제문서 자료층에서는 창세기와의 연결부분이 없는 반면, 사제문서는 창 50장 22절과 연결하여 족장사와 출애굽사를 연결하고있다. 최종편집자는 사제문서에 의한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연결부분을 출 1장 8-10절과 창 46장 1aβ-5a절 창 50장 24-26절을 통하여 더 확대시켰다.
게르츠의 출 1 - 14장의 분석을 통하여 출애굽기의 현재의 형태는 사제문서이후의 편집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의 연구는 출 1 - 14장에 국한됨으로 비사제문서와 최종편집의 범위와 신학을 알 수 없다는 한계를 낳았다. 다만 게르츠는 육경편집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창 33장 19절, 창 50장 25f.절, 출 13장 19절과 수 24장 32절에서 공동의 모티브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게르츠의 분석은 최종편집의 신학적 상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지 않으며, 최종편집의 역사적 자리도 “포로후기 예루살렘 성전영역”으로 막연히 말할 뿐이다.

§5. 전망
이제까지의 논의에서 살펴볼 때, 오경형성사의 논의는 매우 다양하며, 100년 이상의 긴 논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어 쉽게 해결 될 문제로 보여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제까지 연구들의 일부에서 얻을 수 있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본문배후의 역사적인 배경을 함께 연구해야 한다는 점, 즉 오경의 사회사적 연구를 병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본문형성의 역사적-사회적 동기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본문의 신학적 의미를 바르게 고정시켜줄 뿐 아니라, 본문 형성사의 지도도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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