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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을 치라 25. 교육개발


반석을 치라
-출애굽기 17장 1~8절-
이 중 표 목 사
(한신 목회개발원 원장)
애굽에서 이스라엘까지 가는 도중에는 시나이 반도가 있습니다. 그 시나이 반도를 지나는 광활한 사막에는 물이 없습니다. 그나마 물은 오아시스라고 하는 동네마다 조금씩 있는데 이것도 몇 십리를 가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어떻게 60만 장정을 데리고 물도 없는 광야를 지났을까 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 사실은 우리에게 지금도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광야를 지나가는데 마실 물이 없자 백성들이 "우리와 우리의 자녀를 목말라 죽이려 하느냐"하고 원망하였습니다. 그 때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하겠나이다."
그 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가라. 내가 호렙산 반석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쳐라. 그리하면 거기에서 물이 솟아오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호렙 산 반석을 쳤습니다. 반석은 깨어졌고 물이 솟아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을 마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장 1~4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라는 반석이 깨어지고 신령한 생수가 솟아 올랐다"라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여기서 반석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도 친히 반석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지팡이로 하나님을 쳤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반석이 깨져서 물이 나왔는데 여기에 몇 가지 궁금증이 있습니다. '그때 그때마다 반석을 쳐서 물이 나왔느냐?라는 것과 '아무 반석이나 쳐도 물이 나왔는가?'입니다. 여기에 대한 사도 바울의 신비한 해석이 있습니다.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장 3~4절)
신령한 음료를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다니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다고 했습니다. 땅에 있는 반석이 아니고 따르는 반석으로부터 마셨다고 했습니다.
생수는 반석이 깨져야 솟아나옵니다. 반석이 그대로 있어서는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반석이 깨져야만 물이 나옵니다. 땅 속의 반석을 깨뜨려 나오는 물을 생수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생수가 아니고 솟아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spring water'이고,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은 'living water'입니다. 왜냐 하면 땅 속에서 나오는 물은 마셔도 죽는 물이요,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물은 마시면 죽지 않는 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비한 비밀을 여기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고 계십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수를 마시게 하기 위하여 반석을 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오실 예수에 대한 표징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반석을 모세의 지팡이로 쳐서 깨뜨려 버리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십자가로 쳐서 깨뜨리십니다. 예수의 육체가 깨짐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 생수가 첫째는 보혈의 생수이고, 두 번째는 성령의 생수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 반석을 쳐서 깨뜨림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움직이는 물이 나왔듯이 예수의 육체가 깨짐으로 말미암아 그 육체가 부활의 산 돌이 되었습니다. 반석이 지팡이에 맞아 깨짐으로 생수가 솟는 것처럼 예수의 육체가 깨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의 생수를 보내 주셨습니다. 저희를 따르는 반석으로부터 마셨다는 것은 반석이 깨어지고 산 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산 돌에 대한 신비한 비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부활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도 깨짐으로 부활 생명이 되었고, 부활 생명은 산 돌처럼 생수를 보내 주었습니다. 산 돌이신 이 부활의 생명에서 성령의 생수를 보내주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반석을 쳐야 할 사건에서 세 가지 단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깨진 호렙 산 반석이 있고, 깨진 예수의 육체의 반석이 있고, 오늘 우리 시대에 깨져야 할 반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베드로라. 네 반석을 깨뜨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시대는 우리 심령의 반석, 교회의 목사를 깨뜨려 버리지 않고는 생수가 나올 자리가 없습니다. 공중에서 생수가 내려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에게서 생수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목사를 깨뜨려야 합니다. 목사를 깨뜨려야만 생수가 나옵니다. 공중을 쳐다보면서 "성령이여, 오시옵소서"라고 하지만 공중에 무슨 성령이 있겠습니까? 소리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허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호렙 산 반석이 깨짐으로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갈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육체를 깨뜨려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 이제는 네 반석을 깨뜨려라." 목사가 곧 베드로입니다. 목사가 반석, 교인들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도 아닙니다. 사람이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네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개신교는 '신앙고백 위에' 세운다고 말하고, 가톨릭은 '베드로의 인격 위에' 세운다고 말합니다. 주의 성령께서 감동하십니다. "반석을 쳐라. 성령의 생수는 네 속에 있다. 깨지면 나오고 깨지지 않으면 안 나온다."
여러분, 성령 받았습니까? 성령이 어디에서 더 충만히 오겠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하는 그 고백 속에 이미 성령은 임재해 있습니다. 반석이라는 이름을 줄때 이미 반석 속에 물이 들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반석 같은 우리 속에 성령의 생수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야 할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곧 제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반석을 치는 것은 사도를 친다는 의미입니다. 그때 우리의 심령의 반석에서 생수가 흘러난다는 말입니다.
반석은 땅에 붙어 있습니다. 땅에 붙어 있는 것은 쓸모없는 반석입니다. 이것으로는 집도 지울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반석이 깨지면 돌이 되어 성전을 세웁니다. 반석이 깨지면 거기에서 생수가 나옵니다.
흙에 감추어진 반석은 땅과는 구별됩니다. 흙과 반석은 다릅니다. 창조로부터 흙은 흙이고, 반석은 반석으로 창조되어 나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창세로부터 반석으로 예정된 사람들입니다. 이 반석이 깨져서 산 돌이 되어야 교회를 세울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반석을 깨뜨려야 합니다. 땅에 붙어 있는 반석은 죽은 교회입니다.
오늘날 지상의 많은 교회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교회,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른 반석인데, 이스라엘 백성을 따른다는 말은 '움직인다'는 이야기입니다. 돌이 움직였습니다. 이것이 산 돌입니다. 예수님의 육체가 깨지고 부활의 산 돌이 된 후에는 성령이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다 사도로 부름을 받았는데 이 반석이 깨어져야 이 속에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 부흥사들이 성령을 받으려고 하면 공중에서 성령이 내려오는 줄 압니다. 그러나 성령은 공중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안에 성령이 내재하고 계십니다. 내가 깨질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깨지는 사건입니다. 여러분들 자신이 깨어지는 사건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닐 때 반석은 반석이었지만 땅에 붙은 반석이었습니다. 그래서 땅의 일만 생각했습니다. 육신의 정욕에 매여 땅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그에게 임하면서 자기 자신이 깨어졌습니다. 깨지고 난 그 때부터 그는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리스도를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를 믿으면서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이것은 땅에 붙은 반석과 같습니다. 이 반석이 깨져야 땅의 일에서 하늘의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떠나가는 것이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면 보혜사 성령이 올 텐데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게 될 것이다."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심판도 모르고, 의도 모르고, 죄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말씀을 깨닫고 책망을 받으며 심령을 깨뜨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내 심령의 반석을 쳐야 합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받고서 산 돌의 신비를 알았습니다.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전 2장 4~5절)
우리 안에 성령이 내재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따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따로 받으려고 계속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나에게 흘러 넘쳐 역사하도록 자기 자신을 깨뜨리면 됩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도록 하여야 합니다.
호렙 산 반석은 지팡이로 쳤고, 예수님의 반석은 십자가로 쳤습니다. 오늘 우리의 반석은 무엇으로 쳐야 하겠습니까?
사도행전 2장 36절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들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하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준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들의 "어찌할꼬"라는 그 말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했다."고 했을 때 이 말을 들은 무리들이 자신들이 예수를 죽인 죄인들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율법 앞에서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회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구원적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윤리적 회개는 세상 사람들도 하는 것입니다. "도둑질한 사람들아 회개하라." 그러면 세상 사람들도 도둑질한 것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회개는 윤리적인 것이 아니고 구원적 사건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죄 때문이다. 나는 이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라는 고백과 함께 이 죽음으로 깨져야만 그 속에서 반석이 깨지고 성령의 생수가 내 속에서 흘러나오는 이 놀라운 은혜의 체험을 갖게 됩니다.
아무리 나무의 가지만 쳐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뿌리를 뽑아 버려야 됩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나무를 책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좋은 나무를 접붙이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적 사건을 접붙이는 일입니다. 돌감람나무를 잘라 버리고 참감람나무를 접붙이듯이, 우리의 육체를 잘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접붙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회개입니다.
복음적 회개는 근본적으로 나 자신을 바꾸는 사건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의 죽음에서 자기 죽음을 보아야 합니다. 이 사건이 일어날 때 진정한 내 반석이 깨집니다. 베드로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서야 자기 자신이 깨지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성령의 생수가 흘러 나왔습니다.
주의 종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대개 목사는 교인들에게 회개하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은 회개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자기를 죽여서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을 설교만 가지고는 살릴 수 없습니다. 목사가 죽지 않고는 교인들이 죽지 않습니다. 목사가 회개하지 않으면 교인들도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다 죽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목 매달아 죽였고, 나머지 열한 명은 다 순교의 제물로 죽였습니다. 어떻게 죽든 다 죽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목사는 죽이려고 세운 존재입니다. 강단에서 설교하고,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하면서 교인들을 통치하라고 당회장을 세운 것이 아니라, 하늘이 우리를 세울 때는 죽이려고 세웠습니다. 예수와 함께 죽으라고 세웠습니다. 예수와 함께 별세시켜서 새 생명으로 살도록 하는 하나의 표본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그것이 안 되면 거짓 선지자요, 거짓 목사입니다. 이 원리를 알고 나면 그 때부터 자기 눈이 열리게 됩니다.
오늘 이 아침 주께서 "네 반석을 쳐라. 그 때 네 심령에서 성령의 생수가 흘러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나를 치는 일을 계속해 왔습니다. "교인을 치지 말고 네 자신을 쳐서 죽여라"라는 이 성경의 원리를 안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쳐서 이기도록 감동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목회하면서 최대의 과제를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나 장로를 바로 세우는 데 두지 않고 나를 죽이는 것으로 삼고 목회에 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를 죽이나! 어떻게 하면 순교의 제물로 올려 놓나!" "어떻게 하면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십자가의 죽음을 내게서 체험할 수 있나!" 이러한 목표를 걸고 나가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체험도 하게 하셨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고부에 가서 놀라운 체험을 하나 했습니다. 고난주간에 하루 동안 금식을 하고 성전에 들어갔는데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피를 흘리는 환상이 내 눈에 비쳤습니다. 그래서 눈을 감았는데 내게 들려오는 하늘의 우뢰소리와 같은 음성이 있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음성이었습니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저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다시 저에게 주시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몸 버려 피 흘렸는데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버리느냐? 나는 너를 위해서 희생하였는데 너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 죽였느냐"하면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통곡을 하게 하시는데, 마룻바닥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그 눈물을 쏟은 이후로는 제가 길을 걸어다니면서도 눈물을 흘렸고, 밥을 먹으면서도 눈물을 흘렸고, 계속 울고 다녔습니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통곡을 주신 이후에는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근심하며 탄식하는 눈물은 눈을 흐리게 하지만 반석을 쳐서, 심령을 깨뜨려서 나오는 눈물은 눈을 맑게 합니다.
놀라운 것은 성경의 오묘한 진리와 성령의 신비로운 역사를 통해서 주께서 나를 끊임없이 깨뜨리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나를 회개시키셨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때는 혼자 골방에 들어가서 주기철 목사님의 옥중 찬송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이 찬송을 몇 번이고 불렀습니다. 내 심령이 헤이해져서 세상의 허탄한 생각이 들 때 '주의 위대한 소양(예수의 어린양) 주기철 목사님은 이 찬송을 부르면서 옥중에서 죽어갔는데 나는 멀쩡하게 이 세상을 살면서 허탄한 데 빠져가고 있구나!'하고 회개하면서 찬송을 부르면 눈에서 눈물이 샘물처럼 흘러내렸습니다. "한 발자욱 두 발자욱 걸어가신 자욱마다 피로 얼룩진 순교자의 길을 따라 나도 가야지"라고 결심하면 한없이 감동이 됩니다.
"반석을 쳐라"라고 하신 이 말씀은 우리의 심령을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을 깨뜨리면 깨뜨릴수록 성령의 역사는 강하게 나타납니다. 회개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를 기다리다가는 사탄의 영을 받기가 쉽습니다. 진정한 목회는 목사가 깨질 때 가능합니다. 자기를 깨뜨려서 회개하고 거기에서 성령의 생수가 흘러서 양들이 마셔야 합니다.
양들이 마시는 물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이슬을 먹습니다. 풀에 묻은 이슬을 먹고 일주일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슬만 먹고는 만족한 양만큼 먹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우물물이 있습니다. 우물물을 퍼다 통속에 담아 놓으면 서로 먹으려고 싸우기 때문에 제대로 먹을 수가 없으므로 거기에도 만족이 없습니다.
셋째, 양들이 넉넉히 마시는 시냇물이 있습니다. 시냇물은 물이 많으니까 싸울 것도 없고, 다툼이 없습니다. 그 물을 마실 때만 쉼이 옵니다.
우리는 양들에게 은혜가 넘치는 생수를 마시도록 해야 합니다. 이슬이나 우물물을 마시게 하면 양이 쉬지 못합니다. 목자의 반석이 깨지고 생수가 넘쳐야 양은 만족합니다.
이와 같이 양들을 쉬게 만드는 생수는 목자의 심령이 깨져야 흘러넘치게 되고 그 때부터 쉼이 옵니다.
제가 세미나 강사로 순복음 기도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가 보았더니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이 40일 금식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금식하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능력 받아서 교회 부흥시키려고 금식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능력 받으려면 밥을 잘 먹어야지. 금식해서는 능력 받기가 힘듭니다"라고 했습니다.
금식 기도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능력 받으려고 금식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벌써 욕심입니다. 40일 금식 기도는 자기를 깨뜨리는 기도이어야 합니다. 육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는 떡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은혜로 산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이 금식기도입니다.
40일 금식한다고 다 능력 받는 것이 아닙니다. 40일 금식 기도를 해도 교회가 부흥이 안 되고 오히려 교인들이 다 떨어져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40일 금식 기도를 하면 체력이 약해져서 심방도 더 못하기 때문입니다. 밥 먹고 힘을 다해 기도해야 능력을 받지, 금식하며 기도하면 오히려 능력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한번은 노회에 갔는데 그 친구가 고함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총회 총대 투표에 떨어져서 화가 나 그런다고 하더군요. 40일 금식 기도를 하면 자기를 깨뜨린 사람이 되어야지 시시한 것에 매여서 싸우고 자기 정욕의 노예가 되어 있다면 불쌍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깨뜨리는 일입니다. 저는 일생동안 신앙 생활하면서 중요한 과제를 세웠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죽이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이 자기를 죽이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전 사역은 한 가지였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았으면 부활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았으면 성령도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들의 생명을 풍성케 하러 왔는데 인자가 온 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러 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속물로 주러 왔다"는 말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죽으러 왔다는 뜻입니다. 내가 죽어야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죽으러 왔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룰 수 있는 최대의 성공, 최대의 영광, 최대의 위대함은 자기를 죽이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많이 얻고 이기는 것을 영광으로 아는데,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길이지 예수 믿는 사람들의 길은 아닙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최대의 복입니다. 이 복을 받은 사람들이 성자요, 순교자요, 하늘나라 면류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일생을 가난하게 목회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사모님은 은퇴하면 조그마한 집이라도 얻으려고 근근이 모아 둔 돈을 장롱 속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밤에 강도가 들어와 잠을 깨웠습니다. 목사님 내외는 강도가 시키는 대로 손을 들고 엎으려 있었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무엇이든지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장롱 속에 있는 것 다 내놔. 다 내놓지 않고 내 손으로 찾아 내면 그 때는 끝장이오"하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 때 사모님은 기어서 숨겨진 돈을 강도에게 정중히 주었습니다. 그리고 강도는 사라졌습니다.
목사님 내외는 성령의 무서운 책망을 듣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일생동안 목회하면서 강도 말에 순종하듯 주님 뜻에 순종한 일이 있었는가? 강도에게는 살려만 주신다면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하였는데 너희를 멸망에서 살려 주신 우리 주님께 그렇게 바친 적이 있었는가? 참으로 부끄러운 종이로다"라는 책망을 듣고 목사님 내외는 통곡하면서 회개 했습니다.
강도가 누구입니까? 주님을 결박하고 주인 노릇하는 자입니다. 지금 우리 심령에 무엇이 들어와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하며 탄식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심령에 무엇이 들어와 있습니까? 장사치가 들어 있습니다. 정치꾼이 들어 있습니다. 짐승들이 우글거립니다. 이런 것들을 모두 몰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심령의 반석을 깨뜨려야 합니다.
저는 시골에 가서 농민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시골에 가서 목회를 하면서 날마다 농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지냈습니다. 언제나 농민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한 손에는 성경과 찬송을 들고 심방 가방에는 항상 반바지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옷을 갈아입으면 언제라도 농부가 되었습니다.
한 번은 어느 과부의 집에 갔더니 그 과부가 "사람들이 다 서울로 가니 일꾼이 없어서 농사를 못 짓겠습니다. 변소에 분뇨가 넘치고 있습니다. 이것을 퍼서 밭에 뿌려야 고구마를 심을 수 있는데 일꾼이 없어서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은혜가 넘쳐야지 왜 분뇨가 넘치나?"라고 했습니다.
저는 예배를 드리고 이웃집에서 분뇨통을 빌려서 분뇨를 퍼다가 밭에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몇 번을 하다가 언덕 길에서 미끄러지면서 분뇨통을 뒤집어 썼습니다. 완전히 머리에서부터 발 끝까지 분뇨를 뒤집어 썼는데 그 때 성령께서 감동을 주셨습니다. 섬광처럼 떠오르는 말씀이 '배설물'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장 8~9절)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사도 바울은 세상 영광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세상 자랑, 칭찬, 네 속에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네 코로 냄새를 맡아라. 네가 깨끗한 체하고 네가 모든 교인에게 신령한 체하지만 그것은 다 네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저에게 들려왔습니다.
저는 배설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신비한 감동이었습니다. 그 순간 주의 종이라고 말하면서도 인간적이요, 정욕적이요, 감정적이며 더러운 생각으로 살아가는 자신이 여지없이 노출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말로는 주님의 영광이요, 주님의 뜻이라고 하지만 그 실상은 전부 다 육신의 정욕으로 가득 차 있어서 건드리면 냄새가 나고, 건드리면 혈기가 오르는 종이었습니다.
이 종은 오물을 뒤집어 쓴 채 얼마 동안 그대로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저 자신의 깨어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더럽고 구차한 저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났습니다.
제가 똥통으로 두들겨 맞고는 냇가에서 온몸을 씻으면서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나를 정케 하실 이 예수의 피 밖에 없네"라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오 주여, 십자가의 피로 내 몸을 정하게 씻어 주소서. 내 마음은 먹보다 더 검은 죄로 가득한, 더러운 죄인이옵니다. 내가 선을 행하나 자기 의에 빠진 몸입니다. 내가 착한 일을 행하나 위선자이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은혜로 갚지 못한 죄인입니다. 이 종을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많은 회개를 하였습니다.
반석을 쳐야 합니다. 깨뜨려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의 방망이로 치고, 고난의 방망이로 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다이나마이트로 깨뜨려야 합니다. 목자가 자기 심령의 반석을 깨뜨리지 않으면 생수가 흘러나지 않습니다. 양을 살려야 합니다. 양은 목자가 죽어 내놓은 생수를 마셔야 살 수 있습니다.
2천 년 교회사에는 두 종류의 베드로 교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반석이라는 이름 위에 이 세상의 온갖 영화를 쌓는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는 결국 타락한 교회가 되었고, 수치스러운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반석이 깨어져 산 돌이 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역사 속에 살아있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자기 속에 있는 생수가 흘러내리는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려 하신 것이 아니라 반석을 깨뜨려 산 돌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던 죽은 반석인 베드로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말씀으로 깨지면서 산 돌이 되어 성령의 생수가 흘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산 돌이 되어 초대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는 로마에 들어갔습니다. 네로 황제의 무서운 핍박 속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네로 황제가 로마 성에 불을 지르고 기독교인을 방화범으로 몰아 무섭게 핍박을 하자 베드로는 제자들의 강권을 받아 로마성을 피하여 도망쳤습니다.
그 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베드로가 말하자 이에 예수님은 '네가 도망치는 로마성에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로마 성에 들어가 자수하였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베드로의 처형을 구경하려고 몰려들었습니다.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나를 십자가에 거꾸로 매어 주시오. 나 같은 죄인이 어찌 주님처럼 십자가에 달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베드로는 발을 위로 하고 머리를 아래로 해서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베드로의 눈에서도 코에서도 입에서도 피가 흘렀습니다. 그러나 찢겨진 입술, 피 묻은 그 입에서는 하늘가는 찬송이 흘러나왔습니다. 그의 반석이 깨지고 산 돌이 되어 그는 피를 흘리며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있은 후 기독교인을 핍박하고 죽이는 로마 왕국은 무너지고 그 자리에 바티칸 왕국이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이어 사도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반석 깨뜨리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굳어진 심령의 반석을 깨뜨립시다. 목사가 깨져야 교회가 삽니다. 그 때 교인이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살고 민족이 삽니다. 오늘 우리 자신을 깨뜨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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